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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골이 닳아 없어진 택배 가수 윤성의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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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쌀쌀해진 11월, 따끈한 붕어빵이 생각나는 계절이 왔습니다. 추워진 만큼 따뜻하고 반가운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행복한가에서는 2017년도 행복한가에서 리틀 런치콘서트에 출연해주셨던 가수 윤성님을 만나러 파주 문산까지 다녀왔습니다! 알고보니 윤성님은 가수이기도 하지만 회사 대표님이시자 3남매의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그 이야기를 놓칠수야 없겠죠! 차가운 바람을 가르고 만난 윤성님과의 인터뷰! 함께 보시죠!^^
Q.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2017년도에 행복한가 리틀 런치 콘서트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개 부탁드릴게요:)
네, 그때는 가수로써 뵀었는데 오늘은 한 가정의 아빠로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네요. 저는 18년 차, 택배기사로 시작해서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택배대리점을 운영하는 택배대리점 사장 겸 물류회사 대표 겸 하는 일이 너무 많네요. 저는 종합물류회사 대표로써 7개의 회사를 가진 윤성구라고 합니다. 종종 교육도 하고, 유튜브도 하고, 강의도 하고 등등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Q. 택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2003년도 12월 초까지 베짱이 인생을 살고 있었어요. 라이브카페의 라이브 통기타 가수였으니까요. 그렇게 가수로 있을 때 지금의 우리 아내를 만났고요. 제가 희망이 없어서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에 하루아침에 라이브카페를 그만두었죠. 솔직히 희망이 없었죠. 술·담배로 절어 살고 거의 알코올중독 수준에 그런 사람이었죠. 남들 일할 때 자고 남들 놀 때 놀고. 노래는 해서 밥은 대충 벌어 먹고살았지만 안정치 않은 직업이었어요. 12월에 라이브를 관두고 12월에 바로 택배회사 문을 두들겨서 택배회사에 들어갔어요.
택배기사로 시작한 윤성의 20대 모습
Q. 사모님을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거예요?
라이브카페의 팬과 가수로 알게 되었어요. 집사람이 저를 보러 한 달 동안 손님으로 왔었어요. 같은 직장 동료들이랑 와서 그때 VIP 손님이었어요. 그랬던 게 바뀌었죠. 다시 제가 따라다니기 시작했지요. 그때는 제가 몸무게도 80kg 정도 나가고 거의 굴러다녔죠. 허리둘레도 38 정도 되고 덩치가 있었죠. 그때 집사람이 이야기하는 게 왜 저 인간을 따라다녔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하하.
Q. 또 자녀분이 셋이나 있다고 들었어요! 다자녀를 갖게 되신 이유는?
첫째 딸 중학교 1학년짜리, 올해 초등학교 들어가는 아들이 있고, 늦둥이 4살짜리 아들이 있어요. 첫 번째 딸은 딱 계획한 아이였어요. 원래는 외동으로 하나만 키우려고 했어요. 지금 첫째 딸이랑 둘째 딸이랑 6살 차이가 나거든요. 이게 왜 그랬냐면 친구 부모님 상갓집을 갔는데 친구 혼자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갔다 오면서 스스로 결정을 한 거예요. 나중에 나와 집사람이 세상에 없다면 아이 혼자 장례식장에 앉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선언했어요. ‘둘째 낳을래? 입양할래?네가 안 낳으면 난 무조건 입양한다!’ 그렇게 둘째는 합의하고 갖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아무 계획도 없었는데 하늘에서 뚝 떨어졌습니다. 아내가 불혹의 나이일 때에 갖게 되어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Q. 행복한 가정을 위한 특별한 비결이 있다면요?
저는 365일 8,760시간이 모자란 사람이거든요. 보통 새벽 5시 반에 기상해서 오전에 출근하고 업무를 보고 뭐하고 퇴근하고 씻고 자려고 딱 누워서 집사람한테 인사하는 시간이 새벽 두 시 반이거든요. 늘이요. 저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매일 근무를 하고 있어요. 쉬는 날이 없거든요. 물론 주말 같은 경우는 오후 5시쯤 끝나거나 하기도 하죠. 그렇게 일찍 들어온 날은 무조건 가족들과 있는 시간이에요. 그래서 고기도 구워 먹고 어디든 나가려고 하고 자유로 드라이브라도 하고 와야 제가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그게 제가 가정을 이어가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집사람한테도 늘 이벤트를 하고 있어요. 제가 행사, 강의가 많으니까 거기서 오는 수익금에 대한 이벤트가 많아요. 또 아내를 위해 차도 바꾸어 주고 얼마 전에는 집을 사주었습니다. 아직 제 명의지만요. 하하하. 무엇보다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딴짓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아내가 사람 보는 안목이 있던 거죠. 하하하
제가 스스로 많이 조절하는 것 같아요. 삶의 패턴이라거나 제 주변의 이미지 관리 등에도 신경을 많이 쓰며 살고 있어요. 어쨌든 시간이 나면 무조건 아이들하고 나가든지 놀든지 먹으러 가든지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제가 한주가 불안해요. 매일 아이들이 자는 모습만 보고 나가고, 자는 모습만 보고 들어오니까요.
Q. 세 자녀분 중에 아빠를 가장 닮은 사람이 누구인가요?
둘째하고 셋째가 가장 많이 저를 닮았어요. 그래서 걱정이에요. 근데 셋 다 노래를 못해요. 그래서 집사람이 애들한테 절대 아빠가 가수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해요. 근데 어쨌든 하는 짓, 내가 어렸을 때 군인이 꿈이었는데 우리 둘째가 군인의 꿈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걸 보면 정말 혈육이구나 싶어요. 물론 둘째도 곧 군인의 꿈을 포기하겠지만요. 소심한 성격도 비슷하고요. 제가 트리플 에이형이거든요.
하나 일이 발생이 됐을 때 절절매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모습이 있어요.
Q. 그거와 비교해서 대표님 일은 화끈하게 하시는 거 아니에요?
남들은 화끈하다고 하는데 이미 속은 썩을 만큼 다 썩어있어요. 겉으로 그런 내색을 잘하지 못해요. 옛날에는 저도 욱하는 성격이 있는데 요즘은 많이 좋아졌어요.
Q. 회사에서는 어떤 사장님이신가
저는 회사에서 친구 같고 오빠 형 같고 아빠 같고 무섭고 웃기고 엉뚱하고 막무가내 머슴 같기도하고요. 내가 오히려 직원 같기도 하고요. 대표로서의 삶은 대부분이 위엄있고 거만해 보이고 이런 삶을 사는데 저는 필드를 시작으로 사장이 된 사람이기 때문에 앉아서 업무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앉아서도 업무를 하겠지만 거의 현장에서 거의 비슷하게 일하는 사장입니다.
Q. 보통 대표실이면 이렇게 뚫려있지 않잖아요?
전 그게 싫었어요. 대표라는 막혀있는 공간, 직원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이 싫었어요. 그래서 예전 사무실은 사무실만 단독으로 크게 되어있었고요. 직원들은 밑에 사장들은 위에 이렇게 되어있었는데 소통이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막지 않고 이렇게 다 터놓고 지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제가 사장실에 별로 없다는 겁니다.
Q. 택배 일을 오래 하셨는데 건강은 괜찮으신지 궁금합니다.
무릎이 많이 안 좋아요. 하도 뛰어다녀서 병원에서는 제 연골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매번 시술을 받으러 다니고 있어요. 전에는 축구도 많이 했는데 이제 잘하지 못하고 있고요. 또 나이가 들다 보니까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어요.
Q. 대표님 회사를 이렇게 크게 이끄시게 된 원동력은 ‘가족’인 것 같아요.
네, 가족이죠. 물론 가족 때문에 이 자리까지 왔고 계속 이렇게 가야겠지만, 제가 강의할 때마다 웃음의 소리로 하는 이야기는 나를 이 자리까지 오게 해주신 분은 딱 두 분이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이 운전학원 셔틀버스 아저씨가 저를 이 자리까지 오게 해주셨죠. 제가 택배 배달을 하다가 아저씨를 길에서 마주쳤어요. 나도 어린 20대였고, 그러다 보니까 안 비켰어요. 왜냐면 제가 먼저 진입을 했었거든요. 근데 이 아저씨도 안 비키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신경전이 붙으면서 이 아저씨가 결론은 빠져나온 뒤로 물러주면서 나에게 창문 내리고 구한말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어요.
‘평생 택배나 해 처먹어라 이 새끼야!!!’
그 한마디가 저에게 독을 품게 하고 이곳에 있게 하였어요. 옛날의 택배라고 하면 일제시대의 인력거 정도의 급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대한민국 직업의 제일 밑바닥이라는 생각이 사실 많았고요. 어렸을 때 배송을 하면 멱살도 많이 잡혔어요. 늦게 온다는 이유로요. 또 다른 일화는, 학교에 배달을 갔을 때 선생님이 ‘여러분들 조용히 하세요. 여러분들 선생님 말을 듣지 않고 공부 안 하면 저 아저씨처럼 되는 거예요.’라고 말을 한다거나요. 아 그래서 진짜 난 이걸로 분명히 성공을 한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최초가 최고가 되기 위해서 박사과정도 밟고 있고요.
Q. 현재 사모님을 시작으로, 가족의 원동력으로 택배 박사과정까지. 카.
택배 관련 강의하는 모습
택배 박사라는 자리도 집사람의 내조가 없었으면 있을 수 없었어요. 독박육아라고 하죠. 제가 박사까지 오는 기간에 아이들 셋을 혼자서 케어한거잖아요. 회사는 회사대로 지원하고, 둘째 아이 낳기 전까지 매일 아침 직원들 도시락을 챙겨줬어요. 아침마다 23명의 컵밥을 만들어 줬어요. 직원복지로 하겠다고 해서 임신하기 시작해서 막달까지 했을 거예요. 그러한 일화도 있고 저는 집사람의 내조가 없었다면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고 이렇게 가지도 못했을 거예요.
Q. 택배를 받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택배는 ‘집하’로 시작됩니다. 오후 1시나 두 시에 시작이 돼서 물건을 내리면 지역별로 분류를 합니다. 이 물건을 중앙터미널인 대전, 옥천, 청주, 용인, 곤지암, 군포 등으로 대형차들이 쫙 뿌립니다. 거기서 전국으로 또 분류합니다. 서울 영등포, 서울 종로…. 등등 분류를 하면 그다음 날 새벽 2시부터 동네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제주도까지요. 우리는 오늘 오후 1시에 보냈다고 하면 그다음 날 아침 7시부터 택배기사들이 쫙 모입니다. 그리고 자기 물건이 분배가 돼서 그때부터 배송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터뷰 오셨으니까 숨겨진 이야기도 한번 꺼내 볼게요. 보통 택배기사만 알고 있는데 택배집하 팀도 있습니다. 기사는 배송을 위주로 하고 택배집하 물류 팀은 집하를 위주로 합니다. 물건을 회수해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핸드폰을 파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차피 홍길동에게 물건을 보내야 하니까, 이 물건을 수거해가는 전담반이 따로 있어요.
집하가 늘 먼저이기 때문에 물건을 회수해오는 이분들은 언론이든 어디든 한 번도 나와본 적이 없어요. 근데 집하 일을 하시는 분들도 전국에 되게 많아요. 보통 택배기사만 생각하시는 거죠. 기사님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배송하는 사람인데 집하팀은 오전부터 밤 10시까지 일을 하세요. 배송하는 분들보다도 체력소모량이 훨씬 많습니다. 일하는 시간도 길고요. 하중 물량들을 드는 일들이 많습니다.
택배기사는 하루 할당량만 하면 되는데 집하 물류 팀들은 하루에 몇천 개를 날라야 합니다. 집하팀은 급여제로 되어있고요, 기사는 수당제로 되어있고요. 그런 차이들이 있어요.
Q. 코로나 때문에 온 국민이 택배를 더 많이 이용하고 있잖아요? 많은 분이 꼭 알고 계셨으면 하는 게 있다면요?
지금은 택배가 뉴스에 워낙 많이 나오니까요.‘아저씨! 택배 어제 주문했는데 왜 안 오는 거예요?’ 이런 게 너무 많았었는데, 지금은 과로사다 뭐다 이야기하니까 ‘이제 늦게 와도 괜찮아요.’라고 하셔요. 하지만 아직도 5천만 명 중 4천 9백만 명은 왜 내 택배 빨리 안 오느냐고 합니다. 많은 분이 잘못 알고 계신 것 중의 하나가 택배는 다음날 100%라는 배송 규정이 아닌데 언젠가부터 그게 당일배송이라는 인식이 생겼어요.
사람들의 인식이 아직도 안 바뀌고 있고요. 당신은 택배기사고 나는 소비자니까 기사의 탓이고 죽거나 말거나 그건 당신의 문제고, 힘들어 죽겠으면 때려치워야 한다는 인식이 많다는 것이에요. 그런 것들이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늘 방송에서 했던 이야기 중의 하나는 본인의 남편이 혹은 동생이, 오빠가, 아빠가 택배라는 직업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또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건 택배기사들이 되게 못 배우고 불쌍하고 가진 게 없어서 선택하는 직업으로 생각을 하실 수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거든요. 전문대 이상으로 평균 학력도 높아졌어요. 그리고 연봉도 절대 낮지 않습니다. 물론 하위 연봉을 받는 분들도 계시겠죠. 근데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또 뉴스 기사도 왜곡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택배기사를 너무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저는 그게 택배 산업을 더 저해한다고 생각합니다.
Q. 마지막으로 가족생활중심 행복한가 가족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의 ‘택배의 하루’라는 노래가 아침에 기상 시간으로 하루를 달려서 미래를 바라보는 그런 노래를 썼잖아요. 저는 사실 제가 택배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달려오면서 저만 그렇게 산 줄 알고 있었어요. 근데 대한민국 아빠도, 엄마도, 아이들도 다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더라고요.
저는 구독자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어휴 힘들어 죽겠네~!’하면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것이에요. 내가 힘든 만큼 옆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옆에서 서포트 하는 사람들도 똑같이 힘든 거거든요. 그게 어떻게 보면 톱니바퀴가 잘 맞아서 가정을 이룬다고 보거든요. 근데 아빠만 힘들어한다면 그 톱니바퀴는 끝난다고 봅니다. 죽어라고 일만 바라보고 살지 마시고, 가족을 한번 바라보면서 소소한 삶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남편이라는 이유로, 아빠라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밀어주고 좋게 봐주고 살아갔던 것 같아요. 서로 이해하고 안아주면 될 것 같아요. 그것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택배 인식이 빨리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아시는 것처럼 택배기사가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간다거나, 못 배워서, 가지진게 없어서 택배를 한다는 그런 인식도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택배에 대해 불쌍한 취급받지 않고, 전문 산업으로써 나아갈 수 있는 그런 분야로 봐주시고 응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족을 원동력으로 힘차게 살아가는 택배 가수 윤성님의
‘택배의 하루’ 밴드 라이브 영상 추천드릴게요~!^^
택배 가수 윤성님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유튜브를 구독해주세요!^^
● 택배박사 윤성 물류야 놀자
● 노래하는 택배아저씨
●‘택배의 하루‘ 밴드 라이브 바로가기
택배의 하루
작사/작곡 윤성
아침을 알리는 알람 소리에 두 눈 비비며 하루를 시작 하고
누가 깰까 하는 걱정에 조용히 문을 나선다
부르릉 힘차게 출발하면~새롭게 시작될 세상과
시원히 불어오는 바람 내 얼굴에 닿으면
오늘도 난 달린다 희망찬 내일을 위해
그래서 난 웃는다 날 보는 사람들 있으니
오늘도 난 달린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이렇게 난 노랠 부른다때로는 힘들어 지쳐있지만~
더 크게 펼쳐질 내일 있기에
그렇게 다시 한번 시작해~
힘든 지난날 잊어버리고 오늘도 난 달린다 달린다
희망찬 내일을 위해 이렇게 난 노랠 부른다
이상 행복한가 에디터♥ 였습니다.
♥ 행복한가의 모든 콘텐츠는 여러분의 소중한 지지와 후원으로 만들어집니다 ♥
#택배기사 #택배가수 #윤성
박찬욱에게 영감을 준, 에밀 졸라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보이’, ‘복수는 나의 것’, ‘설국열차’등 수많은 성공한 영화들을 제작하였으며 영화사 ‘모호필름’의 대표인 박찬욱 감독을 아시나요? 박찬욱 감독의 2009년작 영화 ‘박쥐’는 흡혈귀가 된 신부와 그의 친구의 아내가 그리는 비밀스러운 음모를 다룬 독특한 설정의 줄거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두 남녀와 한 가정, 혹시 익숙한 느낌이 들지는 않으신가요? 김옥빈과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 ‘박쥐’는 19세기 프랑스 출신의 작가인 에밀 졸라(Émile François Zola, 1840~1902)의 대표 장편 소설, ‘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만들어졌습니다. 영화의 여주인공 이름이 소설의 주인공인 ‘테레즈’를 따서 ‘태주’라고 지어진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요.박찬욱 감독에게 영감을 준 작가, 에밀 졸라는 처음에는 법률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으나, 토목기사 아버지와 가난한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집안의 어려운 사정으로 공부를 그만두었습니다. 이후 아셰트 출판사에 취직하여 자신만의 글을 쓰고 기사를 작성하면서 차츰 작가로서의 입지를 마련해나가기 시작했지요. 에밀졸라의 주요 작품으로는 ‘목로주점’, ‘테레즈 라캥’, ‘인간 짐승’, ‘제르미날’, ‘나나’,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등이 있습니다.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가상의 가문, 루공 가(家)와 마카르 가의 가족과 후손들이 19세기 프랑스를 어떻게 살아나가는지 생생하게 기술하는 자연주의적 기법을 사용하여 집필한 20권의 시리즈 ‘루공-마카르 총서’는 발매 당시 프랑스 출판계에서 상상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지요. 그의 작품들은 어려운 프랑스 서민의 삶, 노동자의 일과,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욕망을 면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에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책 읽기에 딱 좋은 선선한 가을 날씨가 찾아온 11월, 서민의 삶과 한 가문의 일대기에 관심을 갖고 사실주의적, 자연주의적 기법으로 써내려간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를 따라가며 가족과 함께 독서의 계절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상 행복지기♥ 였습니다. ♥ 행복한가의 모든 콘텐츠는 여러분의 소중한 지지와 후원으로 만들어집니다 ♥
마음의 현상을 표현하는 이율리 작가
여러분은 마음의 현상을 표현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행복한가에서는 그런 마음을 예술로 표현하고 함께 에너지로 공명하는 이율리 작가를 만나고 왔습니다. 예술대학 졸업 후 붓을 꺾고 올해 초 10년 만에 '으앙~~~!!!'하며 찢고나와 100일 동안 매일 그린 그림, 노래, 영상을 전시한 '엄마, 나 여기 있어' 과연 이율리 작가의 '엄마, 나 여기 있어.' 전시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요?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날 서울 만리배수지공원에서 이율리 작가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함께 보시죠! Q. 율리 작가님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마음의 현상을 표현하는 작가 이율리 라고 합니다. 저는 마음을 관찰하고 그 마음의 변화나 마음 속에 일어나는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현상 들을 눈에 보이게끔, 소리로 들리게끔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Q. 마음의 현상을 표현하다니 정말 놀랍네요! 그런 것을 어떻게 주로 표현하시는지,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네, 먼저 저의 생활 공간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100’을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100’이라는 것은 100일 동안, 혹은 100번, 혹은 100장 이런 식으로 일정하게 단위를 끊어서 일정한 시간 동안 마음을 관찰하는 거예요. 그래서 100일 동안 드로잉을 한다거나, 같은 노래를 100일 동안 한두 시간짜리 레퍼런스를 짜서 반복하는 거예요. 수련 같은 거죠. 그것이 저의 근간이 돼요. 그렇게 밖으로 소리를 꺼내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하면서 반응하는 마음을 확인해요. ▲작업실에서 마음을 표현하는 이율리 작가 일상생활에서 작업에 내용적인 주제가 있고 그것을 표현하겠다가 아니라, 제 마음의 역동을 관찰하는 것이 포인트에요. 마음은 한 사람 마음에 모든 마음이 들어있다고 생각해요. 이미 생각으로 알고 있는 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서 떠오르는 것, 내가 모르는 내 마음 같은 것을 감각으로 길러내려고 해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는 거예요. 몸을 움직이면 안 쓰던 어떤 감각이 떠오르거든요. 잠자고 있던 게요. 그래서 제가 생각으로 굴리기 전에 어떤 이미지건, 소리건 꺼내보는 거에요. 이런 소리를 내야지, 이런 그림을 그려야지의 의도를 최대한 배제 하는 것이 저에겐 중요한 거예요. Q. 작가님 이야기를 듣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여행하는 느낌이요. 목적지 없이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무전여행을 예술로 하는 그런 느낌이요. 네 맞아요. 그래서 매일 그릴 수 있어요. 안 그러면 저 같은 경우에는 어떤 주제를 정하고 이런 형상으로 일을 봐야지 하면 너무 긴장되고 그게 원하는 대로 구현이 안 되고, 재미가 없어요. 어디로 가야지 어떤 걸 해야지 목표 없이 두 시간 정도를 온전히 가보는 거예요. 그럼 저도 모르는 뭐가 나오는 거예요. 그럼 재밌잖아요. ▲이율리 作 100일동안 매일 그린 ‘프로젝트 100’ 그림 중 Q. 작가님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그 질문을 듣자마자 떠오른 문장이 있어요. 유능감에 쩔어 있는지도 모른 채 유능감에 쩔어 있던 아이였어요. 초등학교가 강렬한 사회생활 경험의 시작이잖아요. 초등학교 때는 서열화가 시작되고, 또 초등학교 때 다양하게 하는 글짓기, 동화구연, 장기자랑 등이요. 뭐든 하면 다 1등 아니면 상을 탔어요. 공부도 잘 했어요. Q. 와우~! 못하는 게 없는 얄미운 친구였네요. 공부도 잘하지, 미술도 잘하지, 운동도 잘하지…. 근데 속은 되게 외로웠던 것 같아요. 공부 잘 하는 것이 고등학교까지 이어졌었는데 학교라는 체계, 좁은 틀 안에서, 서열 안에서 높은 것을 쟁취하는 것 있죠?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에 능했고, 그런 성취로 저의 외로움이나 심리적인 결핍을 안보고 살았어요. 저를 질투하거나 얄미워 하는 친구들도 있었거든요. 선생님들한테도 굉장히 불성실하게 한 것도 있었고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혼나기도 많이 했는데, 학교에서 혼나거나 친구들과의 관계가 어렵거나 했던 것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아요. ▲5학년 때 하교 후 김치볶음밥을 행복하게 먹는 율리 Q. 굉장히 강인한 학생이었다는 게 느껴져요! 어릴 때 그러기 쉽지 않은데 말이에요. 작가님은 그때부터 그림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건가요? 공부도 잘하셨는데, 미술 쪽으로 진로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이건 후에 끼워 맞춘 생각인 것 같기도 한데요. 학창 시절의 저를 생각해보면 학교라는 세계 안에서, 제가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우월하다고 여기고 무시하고 간과했던 부분들을 결국엔 다 보고 겪게 하려고 예술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왜냐면 저 아무 이유 없었거든요. 누가 하라고 한 적도 없었고요. 정말 그냥 별똥별을 맞은것처럼 동양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했거든요. 집에서 엄청나게 오해도 많이 받고요.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하게 된 길이에요. 너가 평소에 그림 하나 안 그리면서 미술이냐, 동양화냐 이런 소리 듣고. 그 당시 저에겐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한 느낌 때문에 이걸 해야겠다고 결심한 건데, 지금 결과적으로는 예술이라는 도구가 제 마음의 어려움이나 아픔을 보고 데리고 살 수 있게 하는 도구가 되었거든요. 안 그러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그 얘기를 했어요. 학교 다닐 때 모든 생활이 그런 걸 간과할 수 있는 컨디션이었어요. 저는 학교라는 곳에서 점수 잘 받는 것에 대해 도취해 있었고요. 그렇다고 잘난 척을 심하게 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잘하는게 스스로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웠어요. 어렵지 않았고 잘하려고 애쓰지 않았거든요. 그냥 얼추 얼추 했는데 그렇게 잘했던 거예요. 근데 제가 20살이 되고 나서 그게 딱 안되더라고요. 정말 20살 때부터…. 그게 저에게는 터닝포인트에요. Q. 20살 때부터 어떤 난관이 있으셨던 거예요? 정말 예술이라는 것은 정답이 없잖아요. 학교에서 보는 시험들은 정답이 있고, 형태가 있잖아요. 어릴 땐 그런 것 파악을 잘 했던 것 같아요. 학교 안에서 이런 글짓기가 상을 받는구나 하는 스타일이 있잖아요. 기본적으로 욕심도 많았고요. 어떻게 써야겠다 파악하고 흉내를 내서 쓰고 했던 게 기억이 나요. 그러면 얼추 성과가 잘 나오고 그런 식으로 살다가 대학교도 정말 그렇게 맞춰서 갔거든요. 고3 때 미대 입시를 준비했는데 재수도 안 하고 한 번에 붙었어요. 그리고 20살 때부터 예술대학 다니며 작업을 하는데, 그 방법이 전혀 안 먹히는 거예요. 저의 전반적인 인생에 있어서 너무너무 취약한 어떤 걸 만난 거예요. 여기서는 어떤 정답을 맞춰야 하는지 파악이 안 되고요. 그때부터 고난이 시작 됐어요. 대혼란이 왔죠. 그리고 졸업하고 나서 저는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어요. ▲左: 대학교 3학년때 이율리 作/막걸리 트름읍,100호, 2005 년. ▲右: 대학교 4학년때 이율리 作/Jackpot hill,100호, 2006년 Q. 오랫동안 그림을 못 그리셨다니, 정말 슬픈걸요? 제가 동양학과를 졸업하고 10년 동안 그림을 못 그렸었어요. 그러다가 10년만에 정말 ’으앙~~!!!‘ 하고 찢어내듯이 폭발하듯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제가 그림을 그만뒀던 이유는 그림을 그리는 게 너무 어려워서 그만뒀거든요. 화판앞에 좌절하고 말그대로 붓을 꺾었었어요. 너무 어렵고 힘이 드니까…. 그때는 한 그림을 몇 개월간 그렸고, 대학교에서 배웠던 기법이 그러했었고, 그림을 위한 설계를 짜고 설계대로 하청받듯 그리는 과정이 고역이었어요. 근사한 무언가를 애써 만들어 내려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러다 한 10년 만에 거의 막 갈기듯이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 거예요. 아이처럼. 그렇게 100일을 그렸어요. 그렇게 10년 만에 나온 제 그림은 너무나도 흉측했어요. 지금 보면 괜찮은데, 그린을 갓 보았을 때 제 그림이 너무 무서웠어요. 방언 터지듯이 그림이 나오는데, 제 그림이 무서워서 많이 울었어요. 그렇지만 100일간 매일 그려서 내 마음이 안에서 뭐가 나오는지 끝까지 보고 싶었어요. ▲이율리 作 100일동안 매일 그린 ‘프로젝트 100’ 그림 중 Q. 그런 의미에서 올 초에 진행하셨던 ’엄마, 나 여기 있어.‘ 전시회의 의미가 남다르실 것 같아요. 네. 그렇게 그림을 그린 지 50일쯤 되었을 때, 제 그림이 너무 남사스러웠다고 느꼈지만 반드시 전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현실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은 안 잡혔지만, 각오는 서더라고요. 이거야말로 정말 전시해야 하는구나, 이거야말로 진짜다!! 이 전시 이름의 ‘엄마’ 는 저의 생물학적 엄마라기보다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제가 살아 오며 못 보고, 억눌러져 있던 숨은 마음들, 모든 존재, 그 자체의 모습이 ’엄마, 나 여기 있어.‘로 말하는 것 같아요. 이것저것 생각하고 옳다그르다 따지다가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들이 얼굴을 내미는 거에요. 아예 못 보는 것들. 소외시킨 마음을 세상 밖으로 커밍아웃 해야 하는구나! 라는 주체적인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 전시회 블로그 소개 바로가기 : https://loloolou.blog.me/221803374745 Q. 그때 작품 몇 개 좀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작업 과정은 어떠하였는지 제가 3층 건물에서 전시했어요. 메인이 되는 2층 예배당에 100일 동안 하루에 한 장씩 그린 그림을 붙였고요. 1층에서는 다음 200일 프로젝트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몸을 전시했어요. 퍼포먼스로 그곳에서 그리는 모습 자체를요. 매일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얘기 에요. 지하에서는 그날 아침에 한 두 시간 부른 노래를 영상으로 틀어놨었어요. 그렇게 지하에는 노래, 1층에는 몸, 2층에는 100장 그림, 3층에는 제가 쓴 글을 낭송했어요. Q. 작가님에게 생물학적 엄마는 어떤 존재인가요? 저희 엄마는 회복해야 되는 무언가이자 야생적이고 아이 같은 사람이에요. 제가 어릴 때 엄마를 교양이 없고 감정적이고 사려 깊지 않고 고상하지 않다며 판단 했었어요. 그 판단이 저의 온전한 판단이라기보다 아빠의 시선이 투영된 것 같아요. 또는 사회적으로 여자 에게 강요하는 시선이요. 어릴 때 제가 사회에서 학습한 여성상이 정답이 아니었던 거죠. 저희 어머니는 아이 같이 마음이 발달하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시고 직설적이에요. 이성으로 통제하는 것들 때문에 억눌리고 짓눌린 야생의 상태 같은 것. 저희 엄마가 그걸 상징하는 것 같아요. 근데 살아보니 야생성을 되 살려야 생명이라는 것이 살 수 있는 거에요. 저희 엄마를 휴대폰에 ’귀여워‘ 로 저장되 있어요. 제가 좁은 사회에서 학습받은 기준으로 엄마를 충분히 귀여워하고 사랑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제 자신도 그렇고요. 제가 엄마를 좀 많이 닮았거든요. 닮았는데 엄청 얌전하게 스스로를 길들였어요. 살아남으려고. 사회에서는 그래야 하는 줄 알고요. ▲이율리 作 ’MOM 엄마! 엄마마마음마 우리엄마‘ Q. 어머님이 전시회 보시고 반응은 어떠셨는지요? 어머님은 전시회에서의 엄마가 본인이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실제로 엄마와의 사건이 있었을 때였거든요. 제가 1년간 엄마랑 절교했었어요. 제가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터 쭉 저는 작가 생활을 하면서 안 죽을 만큼의 작은 돈벌이를 하면서 지냈어요. 저희 엄마가 보기에는 제가 백수인 거예요. 예술을 한다고 하는데 뭐를 크게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엄마가 저에게 ‘백수, 노처녀’ 이런 식의 언어폭력을 많이 하셨어요. 부모님은 지방에 사시기 때문에 우리는 1년에 두어 번 만나거든요. 오래간만에 만날 때마다 저에게 비하적인 발언을 많이 하셨고, 저도 속이 많이 곪은 것에요 새로운 관계 정립이 필요하다 싶었어요. 1년 동안 엄마와 교류 없이 떨어져 지내기로 한게 정말 잘한 선택이었어요. 그림작업이 시작되었고, 스스로 치유하면서 엄마의 마음을 되게 많이 이해하게 됐었어요. 그렇게 1년 만에 엄마를 전시장에서 만난 거예요. ▲이율리 作 ’‘엄마, 나 여기 있어.’ 전시 그림 중 Q. 극적인 화해가 되었군요~!! 캬아! 뭔가 어머니로서는 화해하려고 기획한 전시회라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어요. 네. 역시나 귀엽게 ‘엄마, 나 여기 있어.’ 에 ‘엄마’가 본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계시더라고요. 근데 그 ‘엄마’가 영 아닌 건 아니니까요. 당신한테 상처받은 제 내면 아이의 외침이기도 하고요. 그 내면 아이는 엄마가 온 우주 잖아요. 엄마를 너무 대놓고 외쳐놓으니까, 저희 엄마도 최대한 조심하면서 열심히 보고 가셨어요. 하하하. ▲이율리 作 ’‘엄마, 나 여기 있어.’’ 전시 그림 중 Q. 제가 기억하는 작가님 예전 작품 중에 한복 입고 유산균을 나눠주시는 것을 보았거든요. 예전에 요구르트 아줌마 복장도 하시고요.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처음 제가 요구르트 아줌마 분장했을 때 ’외롭고 웃긴 가게‘를 만들었어요. 그때 배드민턴 셔틀콕에 점토를 만들어 붙여서 쓸모가 애매한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쇼핑몰 이었어요. 뭔가를 만들다가 더 잘하려고, 예쁘게 만드려는 어떤 지점에서 딱 멈추는 거예요. 그거는 되게 감각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더 붙일 거 없다 느껴질 때까지 아주 짧게 10분 정도 하는 거예요. 작업 시간을 정확히 재서 당시의 최저시급으로 환산해서 파는 작업이었거든요. 쓰임이 모호하고 상품 가치도 모호한 것들을 나누고 팔고 그런 작업을 했었죠. 쓸모와 노동에 대한 이야기 였어요. 저는 제가 예술을 한 이후에 자본주의 세상에서 버림 받은 것 같았어요. 요구르트 아줌마는 요정처럼 세상 곳곳에 있잖아요. 얼굴은 다르지만요. 그러면서 지극히 일상적인 작은 것을 파시는 노동자인 부분이 인상적이었고, 그렇게 일상적인 인물로 분장하여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었어요. ▲요구르트 아줌마 분장을 한 이율리 작가 '발효여신' 그 작업은 수년전 작업이고요, 2019년엔 아예 실제 유산균을 가지고 작업을 했어요. 유산균을 배양해서 사람들에게 분양하는 작업이에요. 제목은 “유산균네트워크: 부디 살아서 장에서 만나. Please be alive and meet on the 場” 길지요? 긴거 중요합니다. 이 작업 시작하기 전 시점이, 엄마랑 뜨겁게 이별했을 때거든요. 그때 생각했던 게 우리가 혈연가족 없이 연대하는 공동체에 관한 고민이에요. 작업에서 족보도 만들고 종친회 퍼포먼스로 했었어요.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유산균 직접적으로 분양하고, 그렇게 관계 맺어진 사람들 첫째 딸 둘째 딸 가계도를 하나씩 만들었어요. 그 유산균이 한 숟가락만 떠주면 우유를 넣어서 계속 대를 이어 키워 먹는 거거든요. 그 개념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경의선 공유지 광장에서 유산균을 나누는 이율리 작가 지금은 사라진 ‘경의선 공유지 광장’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유산균 분양을 했었거든요. 물론 내용에 관심 없이 유산균 분양에만 눈이 멀어서 온 분들도 있어요. 그렇게 손자까지 치면은 30여 명 정도가 되어요. 분양 조건이 있었어요. 한 사람씩 손잡고 서약을 받았어요. 나도 다른 친구에게 유산균을 나눠 주겠다는 서약이요. 그렇게 해서 씨가 뿌려졌어요. ▲유산균을 분양 받고 다시 나누겠다는 서명 Q. 와 종친회에 대모시네요? 네 저는 시조 할머니예요. 유산균 종친회 퍼포먼스를 광장에서 종갓집을 차려 할때 무기력, 무쓸모로 연대해보자가 컨셉 이었어요. 보통 우리가 쓰임으로 만나잖아요. 제가 거기에 대한 콤플렉스 같은 것이 있었어요. ● 종친회 가계도 바로가기 : https://prezi.com/iz_4jbz5f7xh/presentation/ 사람이 무엇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일까? 이부분 늘 모르겠어요, 제가 가진 재능도 없고요. 제가 뭘 잘하진 않아요. 유산균종친회는 무쓸모로 우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자 퍼포먼스였거든요. 자신의 무쓸모를 가지고 광장에 모여 서로 아픈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어떤 게 스스로 생각하기에 힘든 지점인지에 대해서 나누고, 듣고, 공감하고. 유산균이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듣보잡 존재들처럼요. 종친회 멤버들이 각자 다들 유산균을 키워놓고 있으니까, 그 생존한 유산균들을 한대 섞어서 다시 나눠서 먹고 같이 먹고, 다시 건강한 개인이 되어 헤어지고.▲유산균을 배분하며 하나의 가족으로 연대하는 이율리 작가 '유산균명가종친회', '공동체 투더 항체'. 이런 공동체에서 항체를 가지고 ’BE THE 개인‘ 되는거에요. 연대 하되 공통의 무엇에 눌리지 않고 개인적으로 자신의 결을 살리는 것. ▲유산균명가종친회 모임 사진 Q. 크하~ 저도 그 항체 꼭 갖고 싶네요. 다음에 또 요거트 분양 하시면 저도 꼭 받고 싶습니다. 작가님 최근에는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제가 그림 그릴 때 그림에 주제가 없고, 마음의 역동을 관찰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 작업이 이제 400일대로 접어들었어요. 근데 그 작업을 둘이서도 해본 거예요. 그 작업의 제목은 ’해달 정상회담‘ 이에요. 작용 반작용으로 계속 주고받는 작업이에요. 그림의 의미를 해석해서 그림대화를 하는 게 아니고 부루스 같이 같이 춤추는 것 상상하시면 더 가까울 것 같아요. 해달 정상회담은 둘이 하기도 하지만 4명, 6명도 해봤어요. 하다보면 성질이 올라올 수도 있고 재밌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마음 반응이 나와요. 그래서 요즘엔 그림 뿐 아니라 퍼포먼스나 소리로 표현하는 걸 확장되고 있어요. Q. 작가 활동을 하면서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은 언제였나요? 2019년에 했던 첫 개인전 ‘엄마, 나 여기 있어.’ 전시했을 때요. 한 달간 상주해서 있었거든요. 기존의 찐 관계들과 만나는 맥락이 있잖아요. 그 관계들에게도 내어 놓지 못하는 제 속 일기장을 펼쳐놓고 만나는 전시였는데 정말 편안했어요. 제 언어를 찾은 느낌이었어요. 언어라는 것은 그 문화권에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기호잖아요. 저는 텍스트가 참 어렵거든요. 그래서 말이 아닌 이미지나 소리나 움직임의 표현 비중이 커요. 그게 결국은 소통되기를 원하는 건데, 지금은 서로가 뭔지 모르니, 그게 언어가 될 수 없잖아요. 제 작품을 하나만 본다면 ‘이게 뭐야?’라는 질문 많이 받거든요. 못알아 들으시는 거죠. 하지만 공간을 연출하고 작품 여럿을 모아 놓았을 때는 텍스트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뭔가가 전해지는 느낌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사람들이 ‘우와 멋있다’라고 하지 않아도, 그저 편안했어요. 그대로 전달되는 느낌이 좋았어요. Q. 작업을 계속하는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 작업의 원동력은 엄청난 호기심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모든 마음과 현상을 알고 싶거든요. 최근에 씨.씨.씨 (Connected Crying Simulation) 라는 작업을 했었어요. ‘연결된 울음’이라는 의미인데, 관객이 저에게 손을 대면 제가 느낌을 받아서 소리를 내는 거예요. 관객참여 퍼포먼스에요. 막 제가 울면 손을 댄 관객도 울고 그래요. 제가 접촉의 느낌을 시그널로 받아서 다시 제가 소리로 내거든요. 그럼 그 사람이 울기도 하고 제가 울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우리가 평소에 쓰는 소리의 톤이 있잖아요. 화내는 소리라던지 울음소리 같은 소리 정도는 밖으로 표현을 잘 하지 않잖아요. 근데 이걸 제가 소리로 표현을 내면, 이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자극이 되는 거죠. 물론 저도 시그널을 받아서 소리를 내는 거고요. 에너지적으로 공명하는 거라고 할까요? 그런 마음 현상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아요. 그림만 그리는 것은 덜 직접적인 것 같고, 저는 씨씨씨처럼 몸을 이용해서 더 직접적인 것으로 가고 싶고, 지금도 그렇게 가고 있어요. ▲관객으로부터 울음 시그널을 받고 있는 이율리 작가 ● C.C.C. 영상 바로가기 : https://www.youtube.com/watch?v=G4Vx9cYB3zM Q. 앞으로 작가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저의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에요. 그런 모습이 전혀 안 그려지잖아요? 지금 제 꼴도 상상치 못 한 꼴인데, 훗날 어떤 꼴로 노래를 부르고 있을지 상상이 안 가긴 해요. 노래하고 소리하는 작업 하면서 많이 돌아다니고 싶어요. 있는 곳에서 소리로 소통하고 싶어요. 그게 꿈이에요. Q. 마지막으로 가족생활중심 행복한가 구독자분들께 한 말쯤 부탁드립니다. 행복한가 가족 여러분, 여러분도 혹시 자신을 진심으로 만나고 싶다면, 표현해보고 싶으시다면, 자신만의 도구를 찾아서 무엇이든 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요즘 집에 있는 이면지를 다 모아서 책으로 엮어서 그 위에 계속 그리고 있어요.정말 싸고 귀한 짓이에요. ‘어! 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을 때 ‘물감이 없어~!’ 이런 걸로 두려움을 덮잖아요. 그 마음이 들었을 때 바로 할 수 있는 도구는 사실은 늘 옆에 있을 거에요. 이토록 물질이 남아도는 시대에, 내 옆에 있는 만만하고 편한 걸로 시작하세요. 어떤 목적을 위해서 편안한 상태를 착취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이면지 책에 그린 그림을 보여주는 이율리 작가 마지막으로 ‘지금 어떤 상태건 자신의 존재가 사랑임을 기억하라.’ 이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흔히 듣는 말이지만 믿기지 않고 자주 까먹는 것 같아요. 믿음이 필요한 것 같아요. 사랑을 하는 게 아니고, 존재 그 자체가 그저 사랑이에요. 온전히 자기 마음 편을 들어주세요. 요만큼의 오차도 없이 내가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가 그대로 남에게 흐른다고 생각하거든요. 모든 관계와 자유의 출발점은 자기 마음을 잘 이해하고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작가님 인터뷰를 하고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저것 생각하고 옳다 그르다 나누고 보니까 아예 못보는 것들이 있다' 이 문장입니다. 행복한가 가족 여러분, 잠시라도 눈을 감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위해 시간을 내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어떤 상태건 존재 자체가 ‘사랑’임을 기억하기로 해요. 마지막으로 이율리 작가님의 다른 이야기들이 궁금하시다면 유튜브, 블로그를 구독해주세요! * 유튜브 : https://www.youtube.com/user/yasyuly/videos* 블로그 : https://blog.naver.com/loloolou 이상 행복한가 에디터♥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