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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내려주신 그루브, '미니데이트' 윤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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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가 에디터가 밥주걱을 들고 전국 어디든지 찾아간다!♥
행복한가 밥주걱 인터뷰 제 1호, 그 대망의 첫번째 주자는 최근 JTBC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에서 '여자 양준일'씨로 화제가 된가수 50호! 윤영아 님 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이 가진 것을 세어본 적이 있나요?요즘 미니멀리즘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데요, 그렇게 손에 잡히지 않는 그것(?)! 여러분이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뼈속 깊숙히 받은 그것이 무엇인지 하나씩 세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가수 윤영아 씨가 어머니께 받은 그것이 무엇인지 밥주걱 인터뷰 이야기 함께 보시죠~!
Q. 안녕하세요! 행복한가 밥주걱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도 너무 반갑습니다^^ 저는 ‘미니데이트’를 부른 가수 윤영아입니다. JTBC ‘싱어게인’ 방송을 통해 가수 50호로 오랜만에 여러분을 만나고 이렇게 행복한가에서 인터뷰도 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Q. 최근 JTBC ‘싱어게인’을 통해 멋진 무대를 보여주셨잖아요. 영아 님에 대한 반응도 뜨겁습니다. 소감이 어떠신가요!
제가 ‘싱어게인’을 준비할 때 사실 마트 계산원을 하고 있었거든요. 코로나로 인해 무대에 설 수 없게 되면서 택한 일이에요. 간만의 무대라 많이 떨렸는데 좋아해 주시는 팬 분들께 너무 감사드려요.
원래는 2020년 2월에 앨범 제작과 행사를 할 기회가 찾아와 계약 단계까지 갔었거든요. 이 나이에 이런 기회가 와서 되게 좋아했는데, 그 후에 코로나가 터졌고 모든 행사가 취소되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계약 파기가 돼서 우리 동네에 있는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뛰기 시작했어요. 그런 와중에 제가 24살 때부터 함께한 매니저가 저에게 JTBC ‘싱어게인' 이라는 오디션에 한 번 도전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어요. 망설이던 저는 매니저의 설득으로 도전하게 되었고, 그 후로 재미있는 날들이 펼쳐지고 있네요.
●싱어게인 50호 가수 ’미니데이트‘
Q. 어릴 때 노래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희 집안에 음악을 하는 사람은 없는데요, 우리 엄마가 노래를 상당히 잘했어요. 엄마의 꿈이 가수였거든요. 그런데 시골 분이셔서 연예계에 진출할 기회를 얻지 못하셨던 거예요. 그 한 때문이셨을까요, 저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셨어요. 제가 어렸을 때 교육열이 상당히 높을 때라 보통은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무조건 공부를 강요한다면, 우리 엄마는 그러지 않았어요. 옆집에 아주머니가 자기 딸이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 들어간다고 자랑을 하면, 우리 엄마는 '서울대 들어가면 뭐 하나, 자기 딸은 노래 잘하나!'? 이렇게 얘기하는 엄마였어요.
#어머니의 전폭적 지지
저는 학창 시절 때부터 공부에 스트레스를 한 번도 받지 않고 자란 사람이에요. 무조건 제가 원하는 것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셨어요. 외국 스타일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여튼 좀 특이한 집안이었어요. 밥 먹기 싫으면 보통 굶긴다고 하거나, 억지로 먹게 한다면 우리 집은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된다고 하셨어요. 그런 전폭적인 지지로 고3때 KBS 청소년 창작가요제에서 대상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1990년 KBS 청소년 창작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고3 윤영아
#아무리 아파도 노래하고 춤출 기운은 있다!!
또 제가 어렸을 때 굉장히 병약했어요. 맨날 기침하고 피를 토하고 몸이 굉장히 부실한 이었기 때문에 맨날 아팠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1~2학년 때는 학교를 거의 안 나갔어요. 삼학년 때부터 거의 다녔던 거 같아요. 조금 피곤하고 아프면 학교도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체육 시간에도 스탠드에 앉아 있던 날이 많았어요. 근데 분명히 아픈 애인데 춤을 엄청나게 추는 거예요. 아픈애가 춤추고 노래하고요. 되게 웃기죠! 하하하하. 이게 뭔가 좀 안 맞지요.
#'흥‘이 많은 아이, 클래식 보다는 윤수일의 ’아파트‘
그래서 엄마가 몸에 좋다는 것, 한약 등을 계속 먹이고 그랬어요. 그래서 어릴 때 엉덩이에 주삿바늘이 안 들어갈 정도로 계속 병원에 다니고요, 요양시설에도 있고 그랬어요. 지금 나의 활동적인 모습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고요. 학교 다니기 전에 말더듬증이었어요. 말을 못 했던 아이였어요.
그랬는데 애가 너무 끼가 많은 것이에요. 어렸을 때부터요.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삼익 호르겐 피아노를 사주신 거예요. 그 당시에 우리 집이 잘살았어요. 그때 피아노 있으면 잘사는 집이었어요. 그때 윤수일 선배님 노래 '아파트','황홀한 고백' 나올 때였거든요, 그때 피아노로 클래식을 쳐야 하는데 '딴딴딴딴딴~ 별빛이 흐르는~~다리를 건너~~~' 막 그런 거 계속 치고 클래식은 '소녀의 기도' 막 이러고 쳐야 하는데 맨날 가요만 듣고 피아노치고 그러는 거예요. 노래를 그때부터 이제 시작한 거예요. 어린애가 흥이 너무 많은 거죠. 학교에서 장기 자랑하면 맨 앞에 나가서 춤추고 노래하는데, 또 그 체육 시간에는 뭔가 안 맞는지 또 아파서 관중석에 앉아있고요.
Q. 학교에서 인기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가수의 꿈은 어떤 계기로 키우게 되신건가요?
네, 중고등학교 때 인기 많았어요. 고등학교 때 잊지 못할 친구가 한 명 있는데요, 이름이 지금도 기억나요. '안정미'라는 친구가 있어요. 저에게 카세트테이프 휘트니 휴스턴 2집을 선물해줬어요. 그 앨범을 듣고 세상에 이렇게 노래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저의 친오빠들이 팝송, 헤비메탈을 좋아하셔서 저도 자연스럽게 음악을 많이 듣고 자라긴 했지만 선물 받은 휘트니 휴스턴을 앨범을 들으면서 가수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어요. 가수가 되기 위해서 'Didn't We Almost Have It All' 이 노래를 연습했어요. 그런데 눈이 상당히 높으신 우리 엄마가 저보고 돼지 멱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도 저는 계속하겠다고 해서 모든 코치를 우리 엄마가 다 해줬어요.
Q. 영아 님을 위한 완벽한 맞춤 개인지도 선생님이 어머니셨군요.
네, 맞아요. 저는 음악을 모두 어머니께 배웠어요. 저희 어머니는 굉장히 키도 크시고 서구적인 스타일이셨어요. 대장부 느낌의 어머니셨어요. 지금 저의 그루브는 어떻게 보면 어머니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선비같은 과묵하신 아버지와 결혼하셨지만, 그와 반대로 너무도 자유분방한 영혼을 갖고 계신 어머니는 저의 분신이나 다름이 없었어요.
#고3때 결석만 43번!!! BUT 책임감 하나는 끝내줘요
제가 고3 때 학교 결석을 43번 했어요. 어릴 때 병약했다고 그랬잖아요? 우리 집은 컨디션이 안 좋으면 학교를 왜가? 쉬어! 라고 했어요. 그 당시 학교에 안 가면 뭔가 큰일이 날 것 같은 시절인데 저는 교육열이 하나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컨디션만 안 좋아도 애를 학교에 안 보내고 집에서 쉬라고 했던 거예요. 그런 저의 생활기록부를 본 대학교 면접관, 지금은 고인이 되신 KBS 열린음악회 지휘자셨던 정성조 교수님이 '결석이 많네요. 이런 친구들이 보통 졸업을 못 해요' 하시더라고요. 생활 태도가 나쁘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는 졸업할 수 있다고, 잘 부탁드린다고 면접 볼 때 그랬었어요. 제가 그래도 성실하고 책임감 하나는 끝내주거든요.
#전축 틀어놓고 엄마와 함께 댄스댄스~♬
제가 하도 병약하니까 엄마가 제가 있는 곳에 수시로 드나드셨어요. 어느 정도였냐면 우리 친구들이 '영아야! 너네 엄마 왔어~~' 이래요. 그러면 저는 너무 반갑게 ’어~~!엄마 안녕~~!!‘이래요.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한 모습이었어요. 엄마가 친구들과 먹을 빈대떡, 딸기우유를 만들어주시곤 했어요. 제가 먹을 걸 엄청나게 좋아하거든요. 보통 이런 엄마가 없어요. 엄마가 그런 부분을 많이 신경 써주셨어요. 거의 엄마랑은 친구 이상으로 지냈어요. 집에서 엄마랑 친구들이랑 전축 틀어놓고 춤추고 노래하며 놀기도 했어요. 하하하
▲ 3살 때 엄마와 함께 놀이터에서
Q. 보통 그 시대의 어머니들이 특히 딸보다는 오히려 아들을 더 챙기셨을 텐데요, 그래서 오빠들 질투가 엄청났을 것 같아요.
맞아요, 특히 작은오빠가 많이 질투했었죠. 하하하. 옛날에 정말 성차별적인 거, 남아선호사상 그런 거 있잖아요. 저는 그런 것을 못 느끼고 살았다가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 늦게 깨달은 거예요. 우리 집은 그런 게 없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시골의 정을 가진 대장부 스타일이었어요. 또 힘들게 일하시는 분들을 보면 엄청나게 잘 챙겨주셨어요. 반면 우리 아버지는 되게 신사적인데 냉냉한 그런 스타일, 하지만 영어 잘하는 엘리트셨고요. 보면 엄마는 키도 크고 서구적인 체형이셨는데, 또 아버지는 엄마보다 키가 작고 아담했어요. 그게 너무 재밌네요. 하하하.
▲ 어린 시절 윤영아 가족사진
Q. 어머님이 해주신 음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엄마가 어릴 때 간식을 많이 만들어주셨거든요. 제일 기억에 남는 간식은 ‘과즐’이예요. 찹쌀을 뻥튀기해서 밥풀떼기 같은 것을 꿀로 붙여서 해놓은 거예요.
과즐은 발효식품이든요. 이게 효모를 발생시켜야 해서 방에 뜨뜻한 곳에 놓아야 하는 거예요. 저는 어릴 때 한옥에 살았었는데 연탄보일러였거든요. 과즐이 따뜻한 방안에 가득 펼쳐져 있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엄마가 손이 크셨거든요. 엄청 많이 만드셨어요. 그걸 김장 비닐 같이 큰 봉지에 가득 넣어두고 주변에 선물도 하고, 겨울 내내 먹는 그런 간식이었어요.
Q. 가족과 함께 먹은 최고의 밥상은 무엇인가요?
저희 아버지가 일요일마다 소풍 가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밥상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버너에 찌갯거리랑 고기랑 사서 산으로 바다로 가서 야외에서 해 먹었던 것이 기억나요. 그리고 어렸을 때 우리 집이 부유하게 살았거든요. 항상 식탁 위에 버너가 있었어요. 삼시세끼 모두 고기를 먹었던 것 같아요. 그때 어머니가 김치를 담그셨는데, 만두를 하기 위해 김치를 담그셨던 것 같고요. 주먹만 한 만두도 잊지 못해요. 근데 엄마가 췌장암에 걸려서 돌아가셨어요. 가족끼리 이야기하는 게 있는데, 우리 가족의 추억에 밥상에는 맛있는 고기가 있었지만 사실 고기는 몸에 안 좋다 이거예요. 하하하.
Q. 그래도 그때 가족과 함께했던 밥상의 힘으로, 오늘도 이렇게 멋지게 노래하고 계시잖아요:) 그때 고기 말고 계속 노래하는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는 음악을 할 때 가장 마음이 편해요. 음악을 하는 모습이 가장 ‘나’ 다운 것이니까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겠죠?^^ 그래서 계속할 수 있어요. 저는 신이 인간한테 주신 선물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음악은 그때마다 기분에 따라 선택해서 들을 수 있고요, 힘들 때 위로가 되기도 하고 기분 좋을 때는 더 흥이 나게도 하죠. 나는 음악의 가장 친한 친구예요.
제가 음악을 들을 때는 위로를 위해 편안하게 듣는 게 있고 또 어떤 작업을 위해서 필요 때문에 연구하는 때 듣는 음악이 있어요. 어떠한 상황에서 음악을 듣던 저는 음악과 함께 할 때가 가장 마음이 편해요.
근데 나이가 드니까 예전만큼 목소리가 안 나오더라고요. 옛날에는 아무리 피곤해도 목소리가 잠기지는 않았거든요. 왜냐하면 옛날에는 노래에 정말 자신 있었거든요. 지금은 그때의 자신감은 나오지 않지만, 여전히 저에겐 음악이 제일 좋아요.
Q. 가족으로서 영아 님은 어떤 사람인가요?
사실 가족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포크레인 사업을 하시면서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졌어요. 갑자기 공주가 하녀가 돼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왔어요. 갑작스러운 변화에 내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스물네 살 때부터 노래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저는 다시 20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그 당시에 저는 빨리 30대, 40대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어느덧 내일 모래가 50이네요.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20대
꽃다운 젊은 청춘인 20대때 가족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했기 때문에 가족 자체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지금까지 한 번도 아버지랑 떨어져 산 적이 없거든요. 집안의 모든 책임은 떠안고, 무슨 일이 터지면 내가 그걸 수습을 해서 막아야 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 된 도리라는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도리는 책임이거든요. 내가 꼭 좋아서 싫어서가 아니고요.
▲ 어린 시절 공원 나들이 때 가족사진
#남편을 통해 깨닫게 된 가족의 의미
저희 남편이 9남매 장남이거든요. 남편의 가족은 우리 집이랑 너무 다르더라고요. 어쩔때는 정말 가족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이 아니고 이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항상 그 생각하고 살았어요. 저는 항상 외로웠고, 오히려 내 친한 지인이 가족이었어요. 제가 26살 때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가족의 의미를 그렇게 두고 살아왔어요. 그런데 이 남편의 가족은 정말 화목하더라고요. 저는 가족의 의미를 그때 처음 알았고 성경에 보면 아담에게 하와를 붙여주시잖아요. 그게 돕는 배필의 의미예요.
#아버지를 통해 다시 만난 형제들, 그리고 용서
우리 아버지가 작년에 돌아가실 뻔했어요. 그때 아버지가 보름 동안 중환자실에 무의식 상태로 있었고, 그때 형제들이 싸인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왔어요. 무의식 상태에서 더 연명하지 않겠다는 가족들의 동의를 구하는 그런 사인들을 해요. 그래서 그때 정말 오랜만에 연락을 했어요. 그동안 오빠들을 안 보고 살았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거든요. 우리 아버지 돌아가셔도 연락을 안 하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싸인을 받아야 해서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근데 그때 그걸 느꼈어요. 저는 한 번도 용서할 마음도 없었는데 그런 계기를 통해서 형제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신 것을요. 그래서 용서하자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그 후부터는 지금도 연락을 하면서 살아요. 오빠도 오고 가고요. 그러니까 아버지의 아픔이, 아버지의 죽을병이 가족의 단절되는 것들을 다시 연결하는 큰 고리가 됐고 용서의 그 어떤 사건이 된 거죠.
Q. 영아 님에게 가장 큰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저는 성경 말씀을 들을 때가 참 행복해요. 말씀을 보면서 뭔가 내가 감동적인 것들을 받았을 때 느꼈던 것들을 독후감 쓰는 그것처럼 정리했을 때의 내 마음이 제일 좋고요. 제가 음악을 가르치거나 플레이해서 듣는 그런 게 아니라, 남들이 올려놓은 내가 생각지 못한 콘텐츠의 음악을 듣는 게 너무 좋아요. 우연히 기분 좋은 친구를 만난 그런 느낌이예요.
그리고 오후 6시에 KBS FM 93.1MHz에 '세상의 모든 음악'이라는 라디오 프로가 있어요. 클래식 채널인데 영화음악, 제3세계 음악이 많이 나와요. 그 시간이 노을이 많이 지는 시간이거든요. 저녁에 아름다운 석양과 함께 가사는 없지만, 마음을 울리는 음악이 흘렀을 때 벅차오르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은 그런 거예요.
Q. 하늘에 계신 어머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엄마한테 참 감사해요. 그래도 그때 공부도 좀 시키지! 나중에 보니 제가 학구열이 높은 사람이더라고요. 제가. 하하하. 일반적인 아이들처럼 키우지 않고 특별하게 길러주신, 지금 윤영아를 만들어 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께 모두 감사해요. 어떻게 보면 특이했던 교육 스타일로 내 안에 그루브가 생겼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고기도 먹어본 놈이 안다는 그런 얘기가 있잖아요. 새 장 안에서 굉장히 자유롭게 살아왔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몸짓이나 이런 게 학습되어 나온 것들이 아닌 너무도 자연스러운 그루브인것 같아요. 토종 한국인인데 저보고 외국에서 살다 왔냐고 물어본 사람들이 많아요. 모두 저희 어머니가 전해주신 것들이예요.
Q.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요?
저는 싱어게인을 통해서 대중음악으로 다시 돌아왔어요. 물론 음악은 계속했지만, 음악에 관련된 일을 했지, 대중음악의 길을 가지는 않은 거니까요. 어떻게 보면 다시 신인이 된 거예요. 우선은 지금 유튜브에 '윤영아 TV 미니데이트' 채널을 열었어요. 유튜브를 하면서 활발하게 다양한 활동을 해나가고 싶어요.
제가 유튜브 하면서 느낀 게 뭐냐면 ‘힘’이라는 것은 한쪽에서 무조건 주는 게 아니더라고요. 저에게 격려의 메시지가 오면 나도 위로받고 힘을 받아 같이 상승하거든요. 그것들이 한쪽에서만 나오는 무조건적일 순 없다는 거죠. 저에게 능력이 허락되는 한 그래서 정말 좋은 영향을 끼치는 가수로 남고 싶어요. 그리고 노래를 통해서 조금 더 다양한 콘텐츠로 잘 뻗어갔으면 좋겠어요.
Q. 마지막으로 가족생활 중심 행복한가 구독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요즘 코로나로 모두 일자리를 잃고 힘들잖아요. 이제 좋아질 날만 오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려봅니다. 행복한가 가족 여러분이 코로나로 인해 저처럼 하지 않던 일을 하고 계신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모든 짐이 왔을 때는 내가 할 수 있으니까 그것도 오게 되는 것이거든요. 함께하는 가족을 생각하면 가릴 것이 없는 것 같아요.
결국은 내가 돈을 벌어야겠다는 선택을 한 거잖아요. 물론 저는 하지 않던 일들을 해서 마디마디가 다 나갔어요. 근데 내 안에 뭐가 생겼어요? 아 음악만 하는 게 아니구나, 다른 일을 하며 살아도 또 굶어 죽진 않겠다는 것을 얻은 거예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몸은 힘들고 뭔가 일이 마음에 안 들 수 있어요. 근데 내 안에 힘이 이전보다 더 커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우리 함께 가요!
▲행복한가 주걱을 들고 환하게 미소짓고 있는 가수 윤영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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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튜브 :‘윤영아TV미니데이트’ 바로가기
이상 행복한가 에디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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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게인50호 #여자양준일 #미니데이트
청소일 하는 엄마, 경비원 하는 아빠 이야기를 전하는 공미선 작가
안녕하세요, 행복한가 에디터♥ 입니다. 이번 2021년 1월 둘째 주 화제의 인물은 부모님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작품으로 전하는 공미선 작가 입니다! 우연히 친구따라 관람하게 된 전시회 ‘불효자는 웁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가슴 한켠에 콕 박힌 그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아파트에서 청소하는 엄마, 경비하는 아빠와 함께 돈벌어 오는 것 없는 반백수 예술가 공미선 작가의 이야기 함께 보시죠. Q. 공미선 작가님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언제나 저 자신을 소개하는 일은 너무 어려운 일이지만 제가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보면… 저는 미술을 전공해서 졸업 후 10년간 미술 작가로 살아왔어요. 그렇다고 미술 작가로 유명해지거나 돈을 벌진 못해서,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학교 미술강사로 일을 병행했어요. 또 얼마 전에는 유튜버가 되겠다고 2년 가까이 고전을 했는데 잘 안돼서 그만뒀고, 지금은 뜬금없이 웹툰 작가가 되겠다고 준비 중이에요. 이렇게 저는 딱 한 가지로 정의 내려 소개하긴 어렵지만, 한편으론 여러 가지 정체성으로 변모하며 사는 창작자? 정도라고 소개할 수 있겠네요. Q. 주로 어떤 작업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전시회 ‘불효자는 웁니다’ 에 대한 소개도 부탁드립니다. 저는 앞서 말했듯이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어요. 하지만 작업실에 가만히 앉아서 혼자 그림을 그리는 일보다는 작업실 밖에 나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리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예술을 즐기고 작품도 만드는 공동체 예술이란 분야를 알게 되었고, 몇 년 동안 그런 활동들을 해왔어요. 그렇게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예술이란 것을 했는데 정작 저와 가장 가까운 제 가족은 제가 어떤 일을 하고 다니는지 잘 모르실뿐더러 저한테 그런 것 좀 관두고 취직이나 하라고 하셨죠. 착한 공미선 이제 그만할래요, 공씨 심부름센터, 인생은 달고나 등 다양한 작업을 진행했어요. 그래서 저는 내가 하는 예술이란 것을 우리 엄마·아빠와 해보자 하는 생각을 일명 “불효자는 웁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그 후 엄마 아빠와 이상한 옷을 만들어서 입고 퍼포먼스도 하고, 엄마·아빠의 결혼 이야기를 인터뷰해서 애니메이션도 만들고, 엄마·아빠와 함께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시화도 만들어봤어요. 그렇게 엄마·아빠와 엉뚱한 짓거리들을 하다 보니 3년이란 시간이 홀딱 지났어요. 처음에는 엄마·아빠와 예술을 해보며 내 생각과 삶을 설득시키려고 했는데 끝에 가서는 제가 엄마·아빠의 생각과 삶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어요. ●‘불효자는 웁니다’ 전시회 관련 자료 바로가기 ●부모님의 결혼스토리로 구성한 ‘우연히 관식이를‘ 애니메이션 바로가기 Q. 엄마·아빠와 함께 작업을 한다니 정말 의미 있네요! 사진들도 너무 인상 깊고요. 네, 저는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그 결실인 작품들을 전시로 소개하는 과정만 남겨뒀었는데 전시 또한 녹록지 않았어요. 저는 정말 즐겁고 소중하게 작품들을 만들었는데 정작 남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는지 우리의 작품을 받아주는 갤러리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결국 제가 사는 9평의 자취방을 비우고 전시를 열었어요. 부모님은 제대로 된 전시장도 아니고 그런 곳에서 무슨 전시하느냐고 추잡스럽다며 와보시지도 않으셨어요. ▲공미선 作 ‘불효자는 웁니다’ 전시장 사진 그리고 여전히 예술은 때려치우고 취직을 하든지 시집을 가라고 늘 잔소리를 하시죠. 하지만 그 전시를 마친 뒤 언젠가 저한테 길가에 만들어진 조형물을 보면 제가 떠오르셨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아 미대 나와서 부모 속 썩이는 자식이 여기 또 하나 있구나’ 싶으셨데요. 그냥 지나치듯 하신 말인데 저는 그 말이 너무 좋았어요. ‘함께 예술이란 것을 하며 서로를 알아갔던 그 3년이란 시간이 완전 허탕은 아니었구나.’ 엄마는 ’미술 작가로서의 나를 기억해주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공미선 作 ‘불효자는 웁니다’ 전시 사진 中 Q. 그렇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생각됩니다:) 작가님 요즘에는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지금은 ‘청·경·반’이라는 제목의 만화를 그리고 있어요. ‘청소아줌마, 경비아저씨, 반백수’ 라는 말의 줄임말인데, 말 그대로 청소를 하는 엄마, 경비를 하는 아빠, 반백수인 제 이야기예요. Q. 와우~! ‘불효자는 웁니다’의 연장선인 느낌인걸요? 만화를 그리게 된 동기가 있다면요? 네, 제가 대학을 막 졸업하고 나서 한 뉴스로 세상이 시끄러웠을 때였어요. 제가 다닌 대학의 청소노동자들이 대학을 상대로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장기 투쟁을 하고 있단 소식이었어요. 그때 저는 졸업 후 어떻게든 먹고 살아보려는 와중이라 그 일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아는 사람 누군가가 제게 그 문제를 따져왔어요. 출신 학교 동문으로서 어떤 입장인지 어떤 노력을 할 건지 뭐 그런 얘기였는데 그때 저는 재수 없단 생각에 별 대꾸 없이 무시하고 지나쳤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저는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 댁에 머물다가 귀가 쫑긋하는 얘기들을 듣게 됐어요. 예를 들면 엄마가 일하는 아파트에선 바쁜 출근 시간대엔 청소 아줌마들은 엘리베이터를 못 타게 한다. 라든가 아빠가 일하는 경비실은 한밤중에도 형광등을 켜두고 잠을 자게 한다든가 하는 얘기들이었어요. 저는 그런 얘기를 듣는 순간 아주 오래전의 청소노동자 사건이 떠올랐고, 뉴스에서 이따금 들리는 소식들이 그냥 남의 얘기가 아닌 우리 엄마·아빠의 얘기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우리 엄마 아빠, 또 저의 일터에서 벌어지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얘기를 만화로 1년 정도 그리는 중이에요. 어느 정도 분량이 나오면 포털사이트나 SNS 같은 플랫폼에 올려 볼 계획이에요 Q. 너무 기대되는 만화예요! 살짝 몇 컷 보여주실 수 있나요? 계속하는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네, 스케치 초안본인데 지금은 디지털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나중에 나오게 되면 알려드릴게요^^~! 저는 전시를 앞두고 있거나 작품 마감 기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떤 동기로 계속 작품활동을 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아요. 그럼 그냥 ‘좋아하는 일이니까.’라고 대답하고 마는데 또 한편으로는 원래 성격이 성실한 편이기도 해요. 여기 행복한가에서 인터뷰를 하는 거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 성실함은 우리 부모님께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보고 자라며 배운 게 엄마·아빠가 악착같이 열심히 사는 모습이어서 저도 그게 몸에 밴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큰 재능도 없고, 똑똑하지 않으니 열심히라도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어요. ▲공미선 作 만화 ‘청·경·반’ 초안 스케치 Q. 가족으로서 공미선 작가님은 어떤 사람인가요? 저는 술래놀이로 치자면 해바라기, 홀아비, 깍두기 그런 존재예요. 엄마·아빠는 제게 언제나 안정적이고 평범한 삶을 원하셨고, 학창 시절에는 어느 정도 그 뜻에 맞춰 살아왔어요. 그런데 졸업하고 제가 예술 한답시고 제멋대로 살고 있으니 저는 가족에서 늘 골칫덩이인 거죠. 당신들이 배우지 못하고 없이 살았으니 내 자식은 좀 잘 살았으면 하는 부모님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그 바람에 타협해서 살 수는 없으니 죄송한 마음이 커요. 하지만 저는 계속 가족의 해바라기, 홀아비, 깍두기 같은 존재로 남아 저 나름대로 살면서 부모님께 세상엔 이런 삶도 있다고, 이렇게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 보여드리고 싶어요. Q. 작가님에게 가장 큰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저는 세상 사람들의 인정보다 저 자신의 만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고 싶어요. 대부분 사람이 보편적으로 바라는 삶의 기준과 목표가 있잖아요. 저 또한 그런 것을 갖지 못해 슬프고 힘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제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고 점점 그 욕심을 내려놓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요.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진 행복들, 예를 들면 반려견, 친구들, 산책, 차 한잔 마시는 일 이런 것들에 호들갑 떨면서 최대한 행복을 느끼려고 해요. Q.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제 두 분 다 연세도 있으시고 건강도 안 좋아지셔서 퇴직이 몇 년 남지 않으셨어요. 평생 성실이 미덕이라 생각하고 일만하고 사신 분들이라 정작 일을 관두고 나시면 어떤 생각이 드실까 궁금해요. 약간 무력하고 우울해지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고요. 하지만 노동과 자식 걱정은 두 번째로 미루고 당신들의 삶을 쁠뤡스~하면서 사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 쁠뤡스의 첫 시작으로 내년 여름엔 제주도로 다 같이 가족여행 가자고 제안해 보려고요. ▲공미선 作 ‘착한 공미선 이제 그만할래요’사진 中 Q. 앞으로 작가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즐겁고 신나게 사는 거요. 칠십이 되고 팔십이 되어도 철없는 할머니가 돼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즐겁고 신나게 살고 싶어요. 그때까지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너무 많을 것 같거든요.▲공미선 作 ‘착한 공미선 이제 그만할래요’사진 中 Q. 마지막으로 가족생활중심 행복한가 구독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같이 평범하고 별거 없는 사람이 이런 말씀을 전해도 되는지 의구심이 들고 송구하지만,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2020년이 코로나로 심심하고 우울한 한 해가 되셨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찐 행복이 무언지 곰곰이 생각해볼 시간이 되셨을 거라 믿어요. 2021 신년에도 세상이 바라는 행복이 아닌 우리 각자의 찐 행복을 향해 달려가는 삶이 되시길 바래봅니다. 야호 ~~~~~~~~~~ : ) 마지막으로 ‘불효자는 웁니다’에 전시되었던 공미선 작가의 부모님과 함께 작업한 시 한편 함께 나누며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엄마가 되는 집 엄마가 되는 집 좁지만 춥지 않고 조용하지만 외롭지 않은 집 마당엔 개도 한 마리 있어서 딱 알맞은 집. 우리 둘이 살기에 그 집에서 새끼를 낳는다. 누가 애비인지는 중요치 않다. 다만 내가 엄마다 새끼의 엄마는 나다 이제막 엄마가 된 여자는 악쓰던 입으로 뭐라도 씹어 삼킨다 악착같이 씹다가 제볼까지 씹어삼킨다. 이어 또 한술 뜨려니 뜨끈한 것이 울어재낀다 울지마라 울지마라 너는 절대로 서러운것이 되면 안되니까 나도 남들처럼 살 수 있다고 새끼를 안아 볼 수 있는 복이 있다고 믿고싶으니까 지은이-공미선, 글쓴이-공관식, 그림-박우연 공미선 작가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아래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공미선 작가 블로그 ●유튜브 무료한 도전 이상 행복한가 에디터♥ 였습니다. ♥ 행복한가의 모든 콘텐츠는 여러분의 소중한 지지와 후원으로 만들어집니다 ♥
내 가슴, 안녕하니? ‘유방랜드’ 임정서 작가
행복한가 에디터가 밥주걱을 들고 전국 어디든지 찾아간다!♥ 행복한가 밥주걱 인터뷰 제 2호는 ‘유방랜드’ 임정서 작가입니다. 혹시 그 유방이 우리가 아는 그것 맞냐구요? 네 맞습니다! 왠지 민망한 듯 감추고 싶은 단어 ‘유방’에게 임정서 작가가 묻습니다. ‘하 와 유 방? 하 우 두 유 두? 내 가슴, 안녕하니?’ 왠지 모르게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단어 ‘유방랜드’ 그 깊은 이야기 속으로 함께 가보시죠! Q. 안녕하세요! 행복한가 밥주걱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임정서 작가입니다. 저는 2013년부터 창작 활동, 예술 활동을 하고 있어요. 영화 제작을 시작으로까지 좀 더 다양한 형태의 예술적 탐구를 하고 있고요, 하나의 어떤 정형화된 분야에 갇히는 것보다는 ‘어떤 것이 예술일까?’라고 하는 부분에 좀 더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면서 지내고 있는 것 같아요. Q. 주로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하고 있어요. 실험영화의 개념에서 영상이 전시장에서 보여지는 작업, 퍼포먼스가 이어져 공연되는 것을 만들기도 하고요. 또 예술 기획 활동도 하고 있어요. 저의 전공이 시각디자인과 일러스트인데, 디자인이라는 게 결국 커뮤니케이션이니까 그런 맥락에서 이어지는 여러 가지 것들을 엮어서 하고 있어요. Q. ‘유방랜드’는 무엇인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유방랜드는 유방암뿐만 아니라, 병과 죽음으로 인한 상실, 그리고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우울을 예술로 호방하게 대처하는 자세를 탐구하는 작업이에요. 건강한 몸과 마음, 사회를 일구기 위해 '가슴 친구'를 모아 연대하며, 함께 예술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 유방랜드의 배경 유방랜드를 시작하게 된 스토리가 있는데요,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유방암 진단을 받으셨어요. 그렇게 계속 치료를 받으시다가 수술도 하셨거든요. 늦게 말기에 발견됐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제가 5학년 때 다시 재발하고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 후 저 스스로 한국에서의 삶이 너무 힘든 거예요. 그런 것 때문에 아버지가 뉴질랜드로 유학을 제안을 해주셨어요. 그곳에 이모가 살고 계시기도 하고요. 그렇게 중2 때 유학을 하게 됐고, 환경적인 환기가 많이 되기도 했으나 그 세월에 저의 마음은 돌아보지 않고 그냥 씩씩한 척 괜찮은 척 지냈었나 봐요. 20대 초반이 되어 우울감 같은 것이 한꺼번에 초반에 몰려오면서 상당히 힘들었거든요. 그런 시기를 겪고 나니까 이게 그냥 예술작업이 아니라, 이게 ‘한’인가? 이걸 그대로 안고 가면 계속 내 발에 걸려 넘어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한번 풀고 지나가지 않으면 나에게 미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유방랜드의 가슴친구 17번 # 엄마를 보낸 슬픔을 극복하자 그래서 예술은 나의 표현 방식이니까 나의 슬픔을 들고 예술로 넘어가 볼까 해서 시작하게 된 거예요. 어떻게 보면 작업이라는 것이 그 주제를 오랜 시간 고민하고 묵상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되게 저에게는 엄마를 떠나보낸 유방암이라는 병, 그 사건이 슬픔이었던 거죠. 그 슬픔이 그냥 함몰되더라고요. 작업으로 극복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거든요. 그럼 내가 이 문제를 가지고 어떻게 살 수 있지? 고민했어요. 이제 죽을 수는 없잖아요. 살아있어야 하니까요. # 극복의 결정체 ‘유방랜드’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극복의 방법이나 어떤 해소의 방법 같은 과정론 같은 심리학 책을 자주 보게 되더라고요. 내가 도달해야 하는 지점에다가 놓고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상황을 구상해보고, 다음에 대입시키는 거죠. 그래서 각각의 심리상태를 담아서 퍼포먼스로 공연작업을 했어요.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했고, 관객이 이렇게 그 공간에 와서 보면서 그 과정을 거치고 이해해서 극복된 마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였고, 그 안에 어떤 주제가 유방암과 그런 걸 마주하는 그런 마음들을 설정해서 만들어보게 됐어요. ● 유방랜드 티져영상 # 유방랜드를 통해 깨달은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특히나 엄마가 병으로 무너졌을 때 받은 삶의 영향이 너무 컸기 때문에,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 구성원이 흔들리는 것이 속상하고 아픈 일이라는 것을 알았고요.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일단 모두 건강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어요. 그래서 유방암 검진하는 동작을 안무가를 섭외해서 같이 따라 하기 쉽게 만들어 영상으로 제작했어요. ● 유방랜드 검진법 영상 ‘하 와 유방? 하우 두 유 두?’ Q. 유방암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한가지 측면이 아닌 다양하게 표현하신 거네요. 유방랜드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나요? 네, 그 후에 지속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유방랜드를 단체로 등록했어요. 건강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한 계속 지키면서 가야 하는 거잖아요. 그것을 스스로 까먹고 있을 때 잃게 된다고 생각했어요. 10월이 유방암 캠페인 달이에요. 매년 지속해서 알려지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인간이 계속 까먹기 때문인 것 같아요. 유방랜드를 통해 자체적인 유방암 캠페인을 어떤 형태로든 계속하겠다고 생각했어요. 2020년도에 유방랜드 시즌 2라고 해서 ‘가슴 친구’라는 제목으로 지금도 계속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강의 유방방유 해프닝 Q. 유방랜드 같은 단체들이 또 있나요? 네, 유방암 관련한 단체들은 있어요. 유방랜드는 저의 개인사와 연결된 추상적인 것에 더 가까운 단체인 것 같아요. 첫 회 때는 자금이 나올 곳이 없어서 유방 관련된 재단에 메일을 보내 협력 요청을 했었어요. 근데 너무 어렵더라고요. 대기업 A사는 유방건강재단이 사회공헌사업 파트로 설립이 되어있어요. 제가 연락을 정말 많이 하여서 팀장님이 한번 만나주셨거든요. 결국 저와 함께하지는 못했었지만, 저에게 소정의 협찬품 같은 걸 보내주셨어요. 아무래도 대기업에서는 대중적인 가치관으로써의 보수성을 깨지 못했던 것 같아요. 예술이라는 게 계획만으로 다 전달되지 않는 많잖아요. 나중에 ‘유방랜드’ 홍보물을 전해드리면서 소식을 전해드렸는데 이걸 이렇게 풀어낼 줄 몰랐다고 하시더라고요. ‘유방랜드’라고 유방을 대놓고 하지만 전혀 선정적이지도 않았거든요. ▲전시와 공연이 결합된 유방체험공간에서 유방랜드 안무 파트 https://www.facebook.com/YouBangLand/videos/567587406934878/ 그래서 그때 깨달았어요. 이 주제를 유방암 인식개선 하려고 하는 부분도 제 개인적으로는 있지만 그런 접점이 사회 공헌 적으로 하는 것과 다르게, 내가 예술가로써 짚을 수 있는 유방들을 대놓고 활동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하는 모든 것들이 유방이거든요. 유방 무덤, 유방 탑, 유방 섬 등이요. 만두도 유방으로 보여서, 만두와 유방을 합치는 그런 작업을 해보려고 해요. ▲ 유방랜드의 프로젝트 Q.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어떤 시간을 보내셨나요? 기억나시는 부분 있으신가요? 네, 그때 제가 어려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엄마는 떠날 것을 아시고는 서서히 정리를 하셨다고 해요. 본인의 배우자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식들을 뉴질랜드에 사는 언니에게 맡기는 입양 절차 같은 것도 알아보시고, 저희랑 같이 뉴질랜드에 가기도 했고요. 여러모로 조사해보셨다고 해요. 하지만 아버지 또한 당사자시니까, 아버지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생각해보면 이런 게 복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몇 년 후인 중학교 2학년 때 저를 이모가 살고 있는 뉴질랜드로 유학을 보내셨어요. 아무래도 예민한 시기인 만큼 환경적인 환기가 필요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Q. 정서님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였는지요? 엄마는 일반적으로 ‘엄마’라는 단어가 가지는 이상향적인 것과는 달랐어요. 엄마는 저에게 친구 같고, 독립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었어요. 일도 계속하시고요. 아버지와 같이 약사셨거든요. 바쁘신 와중에도 항상 챙겨주셨어요. 챙겨줌의 의미가 뭘 해서 주는 게 아니라 직접 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알려주시곤 했어요. 집안일은 분담해서 했었는데, 어떤 규칙을 만들어서 가사노동을 저희에게 하청을 주시는 거예요. 저희도 용돈을 쓰려면 집안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어요. 설거지는 500원이었고요. 그니까 오빠랑 저는 그 일을 따야 해요. 경쟁적으로 하는 그것들이 게임 같고 재밌었어요. 그러면서 당연히 장부를 쓰게 됐고요. Q. 어머니의 그런 교육법으로 정서님이 더 뉴질랜드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군요. 네, 맞아요. 생각해보면 부모님 맞벌이셨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일찍부터 직면했던 것 같아요.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가 아프기 전부터 요리를 했어요. 요리하는 것을 되게 좋아했어요. 돈가스를 만들고 싶으면 엄마한테 전화해서 물어봐요. 엄마가 알려주시는 대로 직접 재료도 사 오고 뚝딱뚝딱 만들었어요. 저녁을 차려놓고 가족들이 맛있게 먹으면 기분 좋아했던 그런 어린이였어요. 예를 들면 고기를 사는 가게가 집에서 좀 멀었는데 어떻게 가는지 모르지만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도 저희 엄마는 과잉보호 없이 어디 가서 몇 번 버스 타면 된다고 말해주셨어요. 제가 직접 할 수 있게끔 이끌어 주신 것 같아요. ▲ 초등학교 3학년때 이모와 함께 Q. 어머님이 ‘유방랜드’를 보셨다면 어떤 반응이셨을까요? 그게 약간 가늠이 잘 안 되는데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오히려 더 씩씩하게 우리 엄마가 살지 못한 내일을 더 행복하게 살 거라고요. 그런 인식을 제가 갖고 있게끔 엄마라는 사람이 그런 태도로 삶을 살았겠죠? 그래서 엄마도 저를 보시고 되게 뿌듯해하실 것 같아요. 근데 너무 슬프고 속상하게 다루는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저에게 오셔서 ‘정서야, 너 그렇게 슬퍼할 필요 없어. 넌 너의 것이 있고, 너의 삶이 있고 행복하게 잘 살면 돼’라고 말씀해 주실 것 같아요. 또 장난처럼 오셔서 ‘만두를 유방처럼 만들어봐’,‘저 가마솥이 유방 같지 않니?’라고 하실 것 같고요. 하하하. Q. 어머님이 해주신 음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아, 참 이럴 때 낭만적인 추억을 말해야 하는데 또 그렇지 않아요. 하하하. 어렸을 때 겨울에 엄마가 김치찌개를 만들어주셨는데요, 찌개를 먹고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거기 내 살 들어가 있어.’ 이러시는 거예요. 순간 ‘엥??’ 하고 엄마를 쳐다봤는데 엄마가 손을 보여주시면서 ‘응, 김치 자르다가 내 손 살점이 조금 잘려서 같이 들어가 버렸어.’ 이러시는 거예요. 너무 어이가 없고 웃겼어요. 그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엄마의 살점이 들어간 김치찌개예요. 물론 맛있었지만, 충격적인 맛도 같이 났어요. 하하하. Q. 가족과 함께 먹은 최고의 밥상은? 밥상 메뉴 같은 것보다는, 엄마와의 마지막 날 식사가 기억에 남아요. 엄마의 마지막 날이 오빠랑 저 학교 가기 전, 그리고 오빠는 수학여행 가는 당일 오전이었어요. 엄마가 그 시기는 많이 아파서 잠을 못 잤어요. 그래서 주로 마루에 앉아 계셨는데, 아침에 분주하게 오빠랑 시리얼을 먹으려고 하는데 유통기한이 지난 거예요. 그래서 안 먹는다고 투덜거리고, 아빠랑 투닥투닥 싸웠던 것 같아요. 그 모습을 엄마가 보시고 ‘그거 내가 먹을게’ 이러시는 거예요. 또 강아지가 강아지 과자를 안 먹으면 그걸 엄마가 들고 계시고요. 완전 쿨하게요. 세월이 지나고 오빠랑 이야기했어요. 그 시기에 우리가 왜 투닥거렸을까, 그게 뭐가 대수라고. 그런 것들 때문에 기억나는 밥상이었어요. 그리고 그날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 시리얼에 대한 기억을 몰래 훔쳐본 오빠 일기장에서도 발견했고요. 살면서 죽음이란 걸 생각하면 별것 아닌 것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임정서 작가 8살 때 가족과 함께 공원에서 Q. 가족으로서 정서님은 어떤 사람인가요? 저는 아빠한테도 ‘나 같은 딸 있어서 아빠는 너무 복 받았다~~’, 오빠한테도 ‘나 같은 동생 있어서 너무 좋지?’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제가 가족에게 잘해줘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 같지만 그보다도 더 표현하고 더 나누고 그래야 더 풍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표현해보는 것 같아요. 가족으로써 저는 철없는 딸 같아요. 정신적 교감을 빼고는 생계 같은 경우는 예술을 선택했고,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기 때문에 역할적인 구성원으로서는 항상 기대고 신세 지고 철없는 그런 상태죠. 하하하. 제 이상은 부모님 용돈 드리는 자녀가 되는 것인데, 지금은 생활하는 정도의 비용 정도는 프리랜서 활동을 통해 충당하고 있어요. Q. 가장 큰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자연스럽게 내가 미소가 지어지고, 아침에 일어나서 너무 행복해서 웃음을 머금고 지내는 상태요. 너무 편안하고 부대끼는 데 없고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너무 상쾌하게 일어나서, 상쾌하게 아침을 맞고 내 주변에 흐르는 환경들을 보고 왜곡되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가짐의 상태요. 내가 너무 힘들 때는 새소리도 예쁘게 들리지 않고 ‘저 새는 왜 저러지?’ 이렇게 되잖아요. 그렇지 않은 상태, 그게 행복 같아요. ▲임정서 작가 3살 때 엄마와 함께 Q. 하늘에 계신 어머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같이 오래 더 있었더라면, 지구에서의 삶을 더 같이 살 수 있었더라면 엄마랑 하고 싶은 게 많았을 것 같아요. 어릴 때와는 다른 매해 나이 때마다 느끼고 보고 하는 것들이 많은데, 그런 것들을 엄마에게 주절주절 늘어놓고 싶어요. 근데 엄마가 없어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되게 고맙기도 한 것이 뒤돌아 생각해보면 친구 같은 엄마였고, 대화가 매우 많았고 항상 물어봐 주시고요, 제 감정을 늘 확인해주는 엄마였어요. 학원에 가기 싫다고 하면 그 이유가 모자란 생각이어도 강요하지 않고 제 결정을 존중해주셨어요. 제가 어떤 친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어서 힘든 거예요. 그걸 고민했더니 당연히 네가 그럴 수 있고, 달라서 그런거고 싫어하는 마음에 대해서 스스로 못 마땅해할 필요 없다고 알려주시는 엄마였어요. 그런 소통의 지점이 없는 가정들이 많더라고요. 저는 아빠와도 편한 대화를 많이 하거든요. 그런 교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게 인생에서 참 큰 복이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좋은 사람이라 내 인생에 짧게 있다가 가셨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Q. 앞으로 작가님의 꿈은 무엇인지? 지금 하고 싶은 일, 해보고 싶은 것들의 가능성에서 저를 열어두고 시도해보는 삶을 사는 것이에요. 힘듦 없이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에요. 인생을 여행하면서 살다가 갈 수 있는 것이요. 온갖 것들을 해보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그냥 저는 재밌으면 하거든요. 어떤 필터가 있긴 한데 그게 제 목적성에 맞으면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그냥 해요. 하하하. 그리고 꿈이라는 게 현실적인 것도 있고 이상적인 것이 있잖아요. 안정성을 만들어야 하는데 안정성이라는 게 아마 그 고정된 무언가 이고요. 하지만 야생마같이 들판에 뛰어다녀야 하는게 저의 성향인데, 이것을 맞춰가는 것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 유방랜드 카세트테이프에 실린 글 中 Q. 마지막으로 가족생활중심 ‘행복한가’ 구독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런 가정에서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것, 단단한 내실을 다지게 해준 것 들을 나누는 것이 숨길 것 없이 당연한 것이고, 너무 좋아요. 하지만 주변에 가까운 친구들이랑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가정에 대한 어려움, 가족 관계에 대한 힘듦, 그리고 선택해서 타고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들에 대한 어려움, 원망 같은 것을 들었을 때 내가 너무 나를 이렇다고 말하는 것이 자랑처럼 비춰질 수 있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오히려 그래서 다른 사회 차원에서의 가정 문제 같은 것에 더 신경을 쓰고 생각해보게 되고요. 그런 것을 함께 바꿔 나갈 수 있는 문화나 흐름이 형성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많이 했어요. 행복한가도 그런 취지를 갖고 계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행복한가 언제나 응원하겠습니다. 오늘 인터뷰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임정서 작가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아래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 ‘유방랜드’ 페이스북 바로가기 이상 행복한가 에디터♥ 였습니다.♥ 행복한가의 모든 콘텐츠는 여러분의 소중한 지지와 후원으로 만들어집니다 ♥